숏폼 시대에 등장한 무려 72시간 연극 '파빌리온72'… 극장의 관습을 파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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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국립극단 제공)


수면도 대화도 자유로운 4320분의 무대, 현대 콘텐츠 소비의 한계와 감각을 묻다

15초짜리 영상도 지루하다며 화면을 넘겨버리는 시대, 무려 72시간(4320분) 동안 단 1초도 멈추지 않는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작곡가 겸 사운드디자이너 카입(Kayip·본명 이우준)이 기획하고 국립극단이 지원한 실험작 '파빌리온 72'가 2026년 3월 26일 오후 6시부터 29일 오후 6시까지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이하며 낯선 감각의 지평을 열었다.


숏폼 도파민에 던진 4320분의 반기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의 '2025 국민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이 문화 소비의 주된 창구로 1분 미만의 짧은 숏폼 영상을 꼽았다. 콘텐츠의 호흡이 극한으로 짧아진 이 시기에 72시간 연속 공연은 그 자체로 시대를 역행하는 거대한 도발이다.


이 작품은 국립극단의 '창작트랙 180°'(완성된 결과물보다 180일간의 창작 과정과 새로운 연극 언어 개발을 지원하는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기획을 맡은 카입은 연극 연습 현장에서 "음악이 없어도 완벽한데 왜 관습적으로 소리를 채워 넣을까?"라는 원초적 의문을 품었다.


당연하게 여겨 온 청각적 헤게모니를 뒤집기 위한 실험은 결국 시간과 공간의 규칙마저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서사의 기승전결이라는 친절한 내비게이션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극단적 형식이 관객의 체력적 한계를 시험해 오히려 대중의 예술 접근성을 떨어뜨린다는 우려 섞인 시각도 존재한다. 반면, 수동적인 관람에 지친 현대인에게 능동적 몰입의 기회를 제공하는 혁신적 예술 경험이라는 찬사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극장의 권위 해체, 관객이 변수가 되다

공연장 문은 3일 밤낮으로 닫히지 않는다. 해가 뜨는 새벽이든 칠흑 같은 심야든 관객은 자유롭게 극장을 드나든다. '파빌리온 72' 안에서는 기존 극장이 강요하던 숨 막히는 에티켓은 휴지조각이 된다.


[ 파빌리온 72의 파괴된 극장 규칙 ]

  • 지정 좌석 철폐 : 전시회처럼 돌아다니거나 바닥에 누워서 관람 가능.
  • 정숙 의무 해제 : 관객 간 대화 허용, 개인적인 독서나 작업(딴짓) 제지 없음.
  • 시공간 통제 포기 : 24시간 언제든 자유로운 입·퇴장 보장.

배우들은 1200쪽에 달하는 바그너의 오페라 대본을 연속으로 낭독하거나, 파편화된 몸짓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청각을 넘어 진동으로 촉각을 자극하는 사운드 디자인과 찢어질 듯한 라디오 주파수 소리가 공간을 메운다.


제작진은 36시간 분량의 대본을 두 차례 반복하는 느슨한 뼈대만 잡아두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배우와 관객의 피로도가 누적되며 발생하는 '오류'와 '어긋남'조차 이 연극이 의도한 가장 중요한 퍼포먼스다. 관객의 딴짓마저 극을 완성하는 우발적 변수로 작용하는 셈이다.


임계점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감각의 전망

생존 전문가들에 따르면 72시간은 재난 상황에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버틸 수 있는 생존의 1차 임계점이다. 기획자인 카입은 생리 현상을 해결할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고 러닝타임 내내 이 재난 같은 공연장을 지킨다.


영국 버밍엄 왕립음악원(RBC) 등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하고 런던 과학박물관 등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소화한 그는, 이번 무대를 통해 통제 불가능한 시간 속에서 인간의 감각이 어떻게 예민해지고 둔감해지는지를 무대 위에 날것으로 전시한다.


통계학적 관점에서 볼 때, 72시간 연속 관람을 달성하는 관객은 전체의 1% 미만일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이미 사전 신청자만 1800명을 돌파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완주 자체보다 '비일상적 시공간에 접속하는 행위'에 가치를 두는 관객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로 풀이된다.


향후 국립극단을 비롯한 공공 예술 기관의 지원 방향성이 결과 중심의 '흥행작 발굴'에서 과정 중심의 '예술적 기초 체력(R&D) 강화'로 무게추를 이동할 확률이 매우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자극에 길들여진 시대, 기꺼이 4320분의 망망대해로 뛰어든 1800명의 관객이 그 수학적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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